AI 스크라이브, 의료 현장의 ‘디지털 서기’가 되다..한국도 확산
AI 스크라이브(AI scribe)가 미국 의료 현장에서 빠르게 필수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 따르면 이미 미국 의사의 10% 이상이 AI 스크라이브를 활용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Abridge, Ambience, Suki, Nabla,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대표적인 기술 기업이며, 전자의무기록(EHR) 기업인 Epic, Athenahealth, 오라클도 자사 플랫폼에 해당 기능을 통합했다.
헬스블루에 따르면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에서 음성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존 에버트(Jon Ebbert) 박사는 AI 스크라이브가 “의료를 변혁할 것”이라고 평가한다. 시장조사기관 그랜드뷰 리서치에 따르면 AI 스크라이브 시장은 2024년 3억 9,710만 달러 규모에서 2033년에는 약 3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AI 스크라이브는 무엇을 하는가
의사는 진료마다 환자의 상태와 치료 계획을 기록해 EHR에 업로드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오랫동안 ‘번아웃’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의사들이 근무 시간 이후 집에서까지 문서 작업을 이어가는 이른바 ‘파자마 타임(pajama time)’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사협회(AMA)가 2016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의사들은 환자와 보내는 시간보다 EHR·데스크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2024년 업데이트된 설문에서는 1만 8,000명의 의사 중 43.2%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번아웃 증상’을 호소했다.
AI 스크라이브는 이러한 문제를 겨냥한 도구다. Abridge의 임상 성공 담당 시니어 디렉터 매트 트루프(Matt Troup)는 이를 “임상 대화를 위한 인텔리전스 시스템”이라고 설명한다. Abridge는 메이요 클리닉, 카이저 퍼머넌테,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 UChicago Medicine 등 200개 이상의 의료기관에 도입돼 있다.
기능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다. AI 스크라이브는 환자–의사 간 대화를 실시간으로 듣고, 의사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 어떤 진단과 치료 계획을 세웠는지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화 내용을 전사(transcript)하고, 전사를 기반으로 EHR에 올릴 임상 노트를 초안 형태로 자동 생성한다. 최종 책임은 여전히 의료진에게 있다. 의사가 초안을 검토·수정한 뒤 EHR에 확정 입력해야 정확성과 법적 책임 측면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
시간 절감과 ‘환자에게 눈을 맞추는 시간’의 회복
AI 스크라이브의 가장 직관적인 효과는 시간 절감이다.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NEJM)이 소개한 10주간 파일럿 연구(3,442명 의사, 30만 건 진료)에서 AI 스크라이브는 총 1만 5,700시간의 문서 업무 시간을 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버트 박사는 이로 인해 “의사가 환자를 바라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문서 작업에 대한 걱정이 덜해진다. 적어도 내 진료에서는 이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환자에게 더 오래 시선을 두고,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의료진이 원하는 AI 스크라이브의 조건
메이요 클리닉은 16개 병원, 45개 다학제 클리닉, 1개 모바일 클리닉 등에서 약 8만 3,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지난 1년 반 동안 Abridge와 Ambience를 도입해 테스트해 왔다. 현재 약 4,200명의 의료진이 AI 스크라이브를 사용하고 있으며, 병원 측은 도입 인원을 더욱 늘리기 위해 설득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에버트 박사가 AI 스크라이브 업체를 선택할 때 가장 중시하는 조건은 ‘출력 결과의 맞춤화 가능성’이다. 일차의(primary care) 의사가 필요로 하는 노트 형식과 세부 전문(sub-specialty) 의사가 요구하는 기록 양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필요가 다르고, 모두가 노트가 특정한 방식으로 보이기를 원한다”고 설명한다.
또 하나의 기준은 ‘너무 많이 축약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 도구는 의사의 사고 과정을 몇 줄의 문장이나 불릿 포인트로 과도하게 압축하는데, 이는 실제 임상 판단의 맥락을 놓치게 만들 수 있다. 에버트 박사는 “의사들은 AI 스크라이브가 자신의 인지 과정을 풍부하게 반영하되, 그 복잡한 사고를 몇 문장으로 단순화해 버리지는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노트’를 넘어, 진료 여정 전체를 돕는 코파일럿으로
AI 스크라이브 기업들은 이미 ‘단순 기록 보조’를 넘어 진료 여정 전반을 지원하는 코파일럿(copilot)으로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 트루프는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노트를 훨씬 넘어선다”고 말한다. Abridge 역시 개발 초기에는 노트 생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현재는 진료 전후 행정 업무 전반에 AI를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보고 있다.
예를 들어 Ambience가 2025년 8월 출시한 코파일럿 제품은 진료 중 실시간으로 환자의 과거 병력을 보여줘, 의사가 그 정보를 고려한 상태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앞으로 에버트 박사는 EHR과의 ‘깊은 통합’을 기대하고 있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혈액검사를 주문하면, 주변 대화를 인식한 AI가 해당 검사 주문을 즉시 워크플로에 반영하는 식이다.
또한 그는 AI 번역 서비스에 대한 기대도 드러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환자와 의사가 언어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다면, 진료의 질과 접근성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30년 의료 경력에서 가장 큰 변화”
에버트 박사는 “의사 생활 30년 동안, 내 진료 방식을 이만큼 바꾼 도구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AI 스크라이브만큼 하루를 ‘제때, 균형 있게’ 마무리하는 데 도움을 준 기술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
문서 업무에 쏟아붓던 시간을 환자 대면과 임상 판단에 다시 돌려주고, 동시에 EHR 시스템과의 통합을 통해 진료 여정을 자동화·표준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면서, AI 스크라이브는 단순한 ‘노트 자동화 도구’를 넘어 의료 현장의 운영 방식을 재편하는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AI 스크라이브·음성기록 솔루션
AI 스크라이브와 유사한 ‘AI 음성 기반 의무기록’ 시도는 한국에서도 빠르게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2025년 응급실·병동·외래 진료실 등에서 의료진과 환자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요약해 의무기록까지 자동 저장하는 국내 최초 AI 진료 음성인식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밝혔다. 단순 음성 전사 수준을 넘어, 대화 요약과 구조화된 기록 생성까지 포함한 사실상 국산 AI 스크라이브 파일럿에 가깝다는 평가다.

서울성모병원은 헬스케어 스타트업 퍼즐에이아이와 함께 대규모 언어모델(LLM) 기반 차세대 AI 의무기록 솔루션 ‘CMC GenNote’를 시범 운영 중이다. 기존 ‘Voice EMR’가 판독문 전사에 초점을 맞췄다면, GenNote는 음성만으로 서식을 호출하고 발화 내용을 각 서식 구조에 맞게 가공해 EMR로 전송하는 형태로,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진의 행정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AI 헬스케어 기업 테서는 건강검진 결과를 자동 분석해 종합소견을 생성하는 ‘온톨 스크라이브(Ontol Scribe)’를 출시해, 서울 양지병원·인천 아인병원 등 국내 병원에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 이 솔루션은 검진센터 인력의 보고서 작성 업무를 크게 줄이고, 연말까지 약 50개 병원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어, AI 스크라이브 개념이 진료 현장뿐 아니라 검진·청구 등 행정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음성기록 특화 사례로는 셀바스AI의 ‘메디보이스(MediVoice)’가 있다. 이 시스템은 영상의학과·수술실·소화기내과 등에서 의료 영상 판독과 의무기록을 음성 명령으로 실시간 작성할 수 있도록 해, 속기 대비 3배 이상 빠른 판독문 입력과 높은 인식률(98% 이상)을 내세운다.
셀바스AI는 향후 협진 스케줄링, 보험 청구, 퇴원 안내 등 병원 내 여러 행정 흐름을 하나의 지능형 AI 에이전트 구조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AI 스크라이브가 한국에서도 ‘기록 도구’를 넘어 병원 워크플로 전체를 잇는 허브로 진화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미국의 Abridge·Ambience·Suki 등과 더불어, 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국내 AI 스타트업의 사례는 “AI가 의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과 행정을 맡아 의료진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코파일럿”이라는 글로벌 흐름이 한국 의료 현장에도 본격적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