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의료 통역 스타트업 No Barrier, 270만 달러 시드 펀딩 유치

헬스케어 VC 4곳 공동 투자… 미국 12개 주 100개 이상 의료기관서 서비스 중

미국 내 영어 비숙련자를 위한 AI 기반 실시간 의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노베리어(No Barrier)가 지난 11월 17일 270만 달러(약 36억 원) 규모의 시드 펀딩을 마감했다.

이번 투자는 A-Squared Ventures, Esplanade Ventures, Rock Health Capital, Fusion 등 헬스케어 분야 전문 벤처캐피털이 공동으로 주도했다. 이번 펀딩은 AI 기술이 의료 접근성 격차 해소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다문화 사회에서 언어 장벽이 만들어내는 의료 불평등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2,600만 영어 비숙련자, 의료 격차 심각

미국에는 영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인구가 약 2,6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8%에 해당하는 수치로, 히스패닉계를 비롯해 아시아계, 중동계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특히 높은 비율을 보인다. 건강 연구기관 KFF의 조사에 따르면 언어 장벽을 가진 환자들은 영어 능통자에 비해 자신의 건강 상태를 "보통" 또는 "나쁨"으로 평가하는 비율이 현저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 장벽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넘어 실질적인 의료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거나,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오진, 약물 오용, 치료 지연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응급 상황에서 언어 장벽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미국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언어 장벽으로 인한 의료 사고와 소송이 꾸준히 발생해왔으며, 이는 의료기관에게도 상당한 법적, 재정적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언어 서비스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Kent State University 보고서는 글로벌 언어 서비스 시장이 2025년 768억 달러에서 2028년 981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의료 분야는 정확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통역 시장으로, AI 기술 도입에 따른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영역이다.

기존 의료 통역 시스템의 한계

현재 미국 의료기관에서 사용하는 통역 서비스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첫째는 병원 소속 또는 외부 파견 전문 의료 통역사, 둘째는 전화나 영상을 통한 원격 통역 서비스, 셋째는 환자 가족이나 지인이 임시로 통역을 담당하는 비공식적 방식이다.

전문 의료 통역사는 가장 정확한 통역을 제공할 수 있지만, 비용이 높고 특정 언어의 경우 통역사 수급 자체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원격 통역 서비스는 접근성은 높지만, 대기 시간이 발생하고 비언어적 소통이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가족 통역은 비용 문제는 해결하지만, 의료 전문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환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그리고 통역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No Barrier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에얄 헬덴베르크(Eyal Heldenberg)는 이러한 기존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환자가 영어를 구사하지 못할 경우 통역사를 섭외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과 행정 절차가 소요된다. 바쁜 외래 진료 환경에서 이러한 지연은 진료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린다. 통역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이 통역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는 환자의 민감한 의료 정보가 가족에게 노출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인간 통역사가 있는 경우에도 근본적인 시간 지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의사가 말을 하면 통역사가 이를 듣고, 가장 적절한 표현을 고민한 뒤, 환자에게 전달하고, 다시 환자의 응답을 듣고 의사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진료 시간은 통상적인 경우의 2~3배로 늘어나며,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피로감을 유발한다.

"인간 통역사의 두뇌를 소프트웨어에 담다"

No Barrier는 이러한 문제를 AI 기술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 회사의 플랫폼은 HIPAA(미국 의료정보보호법)를 준수하며, 현재 미국 12개 주 100곳 이상의 의료기관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만다린), 아랍어를 포함해 40개 이상의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할 수 있다.

No Barrier의 핵심 기술은 단순한 기계 번역을 넘어 인간 통역사의 역할을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것이다. Heldenberg CEO는 이를 "인간의 두뇌를 소프트웨어에 담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이 플랫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고 있다.

첫째, 실시간 음성 대 음성(Speech-to-Speech) 파이프라인을 통해 즉각적인 통역이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거치지 않고 음성에서 음성으로 직접 변환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이 유지된다.

둘째, 언어별 맥락을 고려한 통역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 아랍어, 히브리어 등 일부 언어에서는 성별에 따라 문법과 표현이 달라지는데, No Barrier는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반영한다.

셋째, 인간 통역사처럼 능동적으로 확인을 요청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약품명이나 용량 등 중요한 의료 정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경우 "약 이름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대화를 멈추고 재확인을 요청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단순히 언어를 변환하는 것을 넘어, 의료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 가능한 수준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의료 통역에서는 일반 통역과 달리 사소한 오류도 환자의 건강과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실 넘어 의료 전 과정으로 확장 목표

회사의 장기 비전은 단순 대면 진료를 넘어 의료 경험 전반의 언어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다. Heldenberg CEO는 환자가 병원을 방문할 때 겪는 다양한 접점을 언급했다. 일반적으로 환자는 접수 데스크, 간호사 상담, 의사 진료, X-ray나 검사실 등 4~5개의 서로 다른 접점을 거치게 된다. 각 단계마다 언어 장벽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일관되게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No Barrier는 대면 진료뿐 아니라 원격의료(Telehealth), 의료 문서 번역, 병원 웹사이트, 채팅 상담, 동의서 서명, 환자 교육 자료 등 의료 서비스의 모든 터치포인트로 서비스를 확장할 계획이다. 이는 병원이나 의료 네트워크가 모든 환자 접점에서 정확하고 안전하며 규정을 준수하는 다국어 커뮤니케이션 레이어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목표다.

다만 모든 언어와 모든 상황을 커버하기에는 아직 기술적 한계가 있다. Heldenberg CEO는 특히 미국 수화(American Sign Language)의 경우 시각적 요소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현재 기술로는 지원이 어렵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구어 언어와 대다수의 의료 상황에서는 AI 통역이 충분히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의료 통역의 주요 쟁점

AI 의료 통역 기술이 확산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첫째는 정확성과 책임 소재의 문제다. 의료 통역에서 오류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 인간 통역사의 경우 오역으로 인한 의료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비교적 명확하지만, AI 통역의 경우 기술 제공 업체, 의료기관, 의료진 중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법적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이는 AI 의료 기술 전반에 걸친 규제 논의와 맞물려 있는 문제다.

둘째는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보안 문제다. 의료 대화에는 환자의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가 포함된다. No Barrier는 HIPAA 준수를 강조하고 있지만, AI 시스템이 학습과 개선을 위해 대화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하고 저장하는지에 대한 투명성이 요구된다. 특히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의 경우 데이터 유출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셋째는 인간 통역사 일자리에 대한 영향이다. AI 통역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기존 의료 통역사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에서는 AI가 인간 통역사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AI가 일상적인 통역 업무를 처리하고, 복잡하거나 민감한 상황에서는 인간 통역사가 개입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가능하다. 그러나 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의료기관 입장에서 AI 통역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인간 통역사 수요가 감소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넷째는 문화적 뉘앙스와 비언어적 소통의 한계다. 언어 통역은 단순히 단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과 비언어적 신호를 함께 전달하는 작업이다. 특히 의료 상황에서는 환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질병에 대한 인식, 치료에 대한 태도, 의사와의 소통 방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AI가 이러한 문화적 뉘앙스까지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3~4년 내 대규모 채택 전망"

이러한 쟁점들에도 불구하고 Heldenberg CEO는 AI 의료 통역 기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향후 3~4년 내에 이 기술의 대규모 채택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기술 발전과 함께 비용은 낮아지고, 접근성은 높아지며, 프라이버시 보호도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의료 AI 시장 전반의 성장세를 고려하면 이러한 전망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의료기관들은 효율성 향상과 비용 절감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다양한 환자층에 대한 서비스 품질 향상 요구에도 대응해야 한다. AI 통역 기술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Heldenberg CEO는 "우리는 시장의 역동적인 변화와 이 기술들의 채택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며, 기술 발전과 시장 수요가 맞물려 의료 통역 분야에 큰 변화가 올 것임을 시사했다.

시사점: 한국 헬스케어 기업의 기회

No Barrier의 사례는 한국 헬스케어 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미국 시장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의료 기기나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은 다국어 지원을 필수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 미국 내 영어 비숙련자 인구가 2,600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다국어 지원 여부는 제품의 시장 접근성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

둘째, 한국어를 포함한 아시아 언어 의료 통역 시장도 성장 잠재력이 있다. 미국 내 한국계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달하며, 그 중 상당수가 영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어 의료 통역에 특화된 AI 솔루션이나, 기존 플랫폼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시장 진출도 검토해볼 만하다.

셋째, AI 의료 통역 기술 자체의 개발 기회다. 한국은 AI 기술과 의료 IT 분야에서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어-영어 또는 한국어-다국어 통역 기술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국내 의료 관광 시장 확대와 연계해 외국인 환자 대상 의료 통역 솔루션 개발도 유망한 분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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